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완다 내전 (문단 편집) === 가해자 === 실제로 르완다 학살은 가해자들의 처벌이 상당히 제한됐다.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 중 대다수가 평범한 후투족들이었고,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 르완다 인구의 거의 1/3''' 정도로 추산되는데[* 디만 2006년에 있던 한 연구에 따르면, 내전 당시에 사람을 1명이라도 죽인 사람은 약 17.5만~21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의 후투족 성인의 7~8%, 후투족 성인 남성의 14~17%에 맞먹는 값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도 당시 르완다 인구의 2.6~3.1%에 육박하는 엄청난 비율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수치가 이 정도 되면 처벌하고 싶어도 처벌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들을 일일이 잡아다 처벌하면 기껏 봉합했던 르완다가 다시 내전으로 분열돼 영영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학살 이후 르완다의 대통령이 된 [[폴 카가메]]는 본인이 투치족 출신임에도 국가 통합을 위해 대부분의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테오네스트 바고사라, 베르나르 투야하가, 펠리시앵 카부가 등 주도자 몇 명을 제외하면 그낭 조용히 관용을 베풀고 넘어갔다. 그나마 잡힌 이들도 내전의 여파로 인해 경찰도 법원도 박살난데다, 경찰이나 판사 같은 이들도 일부는 학살당하거나 난민이 되었고, 아예 그들 자신이 학살에 가담한 일도 많았기에 재판을 할 여지가 되지 않아 그냥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교도소도 관리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으나, 의외로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은 매우 얌전했고 죄수 폭동 같은 것도 없었다고 한다. 실질적인 처벌은 후투족 지도자 일부로 끝났고 나머지는 가볍거나 형식적인 형벌을 받는 수준에 그쳤다. 실형을 선고한 관리들 중 다수는 [[말리]]의 [[쿨리코로]]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